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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영·수 공부로는 못 느끼던 ‘카타르시스’ 맛봤어요

[한겨레] 전국청소년연극제를 가다


제22회 전국청소년연극제에서 <노란 달>로 대상(국무총리상)을 수상한 제주영주고등학교 연극부 학생들. 한국연극협회 제공“그때, 왜 그런 말을 하셨어요? 이모도 피해자였잖아요. 제가 받을 상처를 정말 가늠하지 못하셨나요?” 동대전고등학교 연극부의 창작극 <루피너스> 가운데 일부이다. 이 연극은 이모에서 조카, 조카의 딸로 이어지는 가정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 극중 화자는 이모로부터 시작한 줄 알았던 학대가 알고 보니 할아버지·할머니 세대부터 가정 내에서 ’대물림’됐다는 걸 알게 된다.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흔하게 일어남에도 가시화가 잘 안 되고, 경찰에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점 등을 날카롭게 지적해 호평을 받았다.

이 연극은 지난 5일 막을 내린 제22회 전국청소년연극제(이하 연극제)에서 최우수상(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받았다. 연극제는 (사)한국연극협회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이 주최했다. 지난 5월부터 전국 16개 광역시?도별 예선 대회를 거쳐, 각 지역 1위로 입상한 최우수 18개교가 지난 7월26일부터 8월5일까지 전북 전주시 우진문화공간 등에서 열정적인 연극 무대를 선보였다.

연극제에 나가려면 작품 연습 약 3개월, 시도별 경연 과정 약 3개월이 걸린다. ‘장기전’인 셈이다. 대학 입시 공부가 지상 과제인 우리나라 공교육 현장에서 연극제 준비를 한다고 하면 ‘연극 전공하려고?’ 소리를 듣는 게 일반적이다. 한데 이 연극제에 나온 청소년들은 모두 연극·연기 전공 등 예술계 쪽 지망생이 아닌 평범한 인문계고등학교 학생들이다. 연극제 쪽에서 심사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예술고교 등은 참여할 수 없게 해놨다. 인문계고 연극부 등 순수 연극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있는 학생들로 참여 자격을 제한했다. 

제22회 전국청소년연극제에서 <루피너스>로 최우수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한 동대전고등학교 연극부 학생들(사진 위). 강원 북원여자고등학교 연극부는 <판결을 내리겠습니다>로 최우수상(전라북도지사장상)을 받았다.(사진 아래) 한국연극협회 제공극본 쓰면서 가정·사회문제 들여다봐

동대전고 연극부 학생들은 연극제를 위해 극본부터 대사, 무대 소품 등을 직접 만들고 구성했다. 특히 연극제에 출품할 극본을 만들기 전에 학생들과 지도교사는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 회의를 진행했다. 문경재 동대전고 교사는 “가정폭력이 생각보다 주변에서 많이 일어난다. 다만 사적 공간으로 인식돼 갈등이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특히 부모의 폭력은 대물림되는 경우가 많다. <루피너스>에서는 할머니와 이모, 조카, 조카의 딸 등으로 이어지는 가정폭력의 아픈 역사와 해결 방안, 고민 등까지 담아보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부모와 자녀들, 그 자녀의 자식들로 이어지는 가정폭력의 문화를 몇십 년에 걸쳐 무대 위에서 재현했습니다. 폭력 가해자를 이해하자는 취지가 아니라, 너도나도 쉬쉬했던, 경찰들마저도 ‘그런 건 집안에서 알아서 해결하세요’라고 법 적용을 피했던 상황들을 연극 무대로 재구성해본 것이지요.”

연극 준비는 학교 분위기를 역동적으로 만들었다. 교실에서 수업 시작만 하면 엎드려 잠들기 바빴던 아이도 정규 동아리인 연극부에 가입해 자신의 재능을 찾기 시작했다. ‘맨날 자던 애’가 ‘주연 배우감’ 소리를 듣기도 했다. 연극부 단장을 맡은 1학년 이수지 학생은 “티브이에서처럼 소리 지르고, 뭔가를 극적으로 표현해내는 게 연기라고 생각했어요. 한데 연극배우 강애란 선생님이 직접 학교에 오셔서 연극의 기본 정신, 배우의 표현 기술 등을 알려주셨고, 눈빛과 몸짓으로 대사를 표현해내는 모든 과정이 ‘나의 내면과 내 친구의 내면이 소통하는 방식’이라는 걸 체득하게 됐습니다.”

가정불화와 폭력 등을 주제로 잡은 만큼 아이들의 실제 경험담이 소중한 밑자료가 됐다. 연극 대본을 만들기 전 학생들은 각자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모와 따뜻한 말을 나눠보는 영상을 촬영했다. ‘(나와 다르게) 우등생인 언니와 갈등 풀기’ 등 실제 가족과 꼬인 관계를 푸는 것도 해봤다. 문 교사는 “극본 및 시나리오 작업 자체가 현실의 갈등을 해결해보는 하나의 촉매가 됐죠. 아이들이 연극에 열정을 가진 만큼 절실함이 있었고, 그 아이들의 가족들도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면서 결과적으로도 좋은 창작극이 나올 수 있었다고 봅니다.”

‘맨날 자는 애’에서 ‘주연 배우’로 성장하기도

이번 연극제에서 역시 최우수상(전라북도지사장상)을 받은 강원 북원여자고등학교는 3월 새 학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번 대회를 준비했다. 6월 초 원주시대회, 6월 말 강원도대회, 7월 말 전국대회까지 숨가쁘게 달려왔다. 창작극 <판결을 내리겠습니다>는 두 가정의 이혼과 양육 문제 등을 다룬 ‘법정물’이다. 2학년 송지원 학생은 “연극부와 교내 작가 동아리가 협업해 극본을 완성했다. 평일에는 밤 10시, 주말에는 밤 9시까지 2~3주 부원들과 연습하며 합을 맞췄다”고 했다. “연극에서는 소품도 중요하잖아요. 직접 구하러 다니기도 하고, 예산 안에서 사기도 했어요. 재판 장면에서는 뒤에 자줏빛 천을 걸어두는 것만으로도 그 분위기가 확 살아나더라고요. 연극은 누가 떠먹여 주는 완성품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하나씩 모든 것을 만들어 내보는 행위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연기 전공을 지망하지 않는 인문계고등학교에서 연극부의 이런 성취는 지도를 맡은 교사에게도 힘이 됐다. 이서현 교사는 “보통 어른들이 ‘애들이 연극을 하면 뭘 어느 정도 하겠느냐’라고 여긴다. 한데 직접 와서 보거나, 지도해보면 알겠지만 학생들의 수준과 열정이 굉장히 높다. 교실에서는 보이지 않던 한 명 한 명의 개성이 날개를 달고 솟아오르는 느낌”이라고 했다. “<판결을 내리겠습니다>는 법 관련한 내용을 청소년 수준에 맞추어 각색한 작품입니다. 대사를 치는 학생들의 표정과 표현력은, 프로 배우의 그것과 견줬을 때 손색이 없었어요.”



지난5일 막내린 전국청소년연극제
올해 5월부터 7월까지 시·도 대회
전국 최종 18개교 본선 올라 경연
가정·사회문제 담은 창작극은 물론
실험적인 ‘스토리 시어터’ 극까지
연극은 협업·소통하는 교육활동
“주말 잊고 연습, 행복한 여름”



무대 소품을 만든 뒤 단체 사진을 찍고 있는 동대전고 연극부. 문경재 교사 제공
학교에서 연극 연습을 하고 있는 제주영주고 연극부. 서문원 교사 제공
대사 주고받으며 감정 몰입하는 게 큰 매력

올해 연극제에선 제주도 학생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단체부문에서는 제주영주고등학교 연극부가 성장 스토리를 담은 <노란 달>로 대상(국무총리상)을 차지했다. 제주도 관내에서는 전국대회 첫 본선 진출이었는데 큰 상을 받았다. 이 학교 김준원 학생이 개인 부문 최우수연기상을 받는 등 학교는 ‘겹경사’를 맞았다.

“그땐 의자 각도를 관객 쪽으로 오픈하고 고개를 숙인 뒤 대사를 쳐야지! 제니는 극중에서 ‘잃어버린 영혼’과도 같아. 우울한 상태를 표현해야 한다고!”

“‘레일라’를 부를 때 관객들이 좀 더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도록 내레이션으로 처리했으면 좋겠어!”

<노란 달> 연습 중 친구들과 끊임없이 주고받는 피드백들이다. <노란 달>은 ‘스토리 시어터’ 방식 연극이다. 이는 배우들이 연기와 내레이션을 번갈아가며 연기하는 것을 말한다. 작품 안팎을 오가며 연기에 몰입하고, 관객들에게 내용 전개를 설명해나가며 배우와 관객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무대 위 소품도 최소화했다. 60분짜리 연극 작품에 의자 3개가 소품의 전부였다.

제주영주고 연극부 지도를 맡은 서문원 교사는 “의자 세 개가 대화하는 테이블이 되기도 하고, 운행 중인 자동차가 되기도 한다. 배우는 대사에 맞게 소품을 이리저리 돌리며 차, 책상, 침대 등으로 활용한다. 관객들은 그것을 보며 자연스레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극장에서 틀면 ‘끝’인 영화 등과는 달리 연극은 ‘지금, 현재의 감각’을 서로 나누는 예술이라는 뜻이다.

공연을 마친 뒤 단체 사진을 찍고 있는 강원 북원여고 연극부. 송지원 학생 제공제주영주고 연극부의 역사는 길지 않다. 서 교사가 지난 2016년 부임과 동시에 연극 및 뮤지컬 공연 동아리를 만들어 뮤지컬 중심으로 운영해온 게 시작이다. 서 교사는 올해 처음 아이들과 ‘연극’에 도전했다. 서 교사 자신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공부해본 경험도 연극부 운영에 도움이 됐다.

서 교사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연극’ 단원이 생겼다. 영어로 연극은 ‘플레이(play)’인 만큼 놀면서 협업 능력을 키울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연극이다. 자신의 배역뿐 아니라 상대방의 피드백과 표정 등 극 전체의 맥락을 보는 힘을 키워주는 게 바로 연극의 강점”이라고 강조했다. 김준원 학생은 “60분짜리 극 한 편의 대사를 모두 소화하고, 맥락에 맞는 감정을 고조?폭발시키는 게 쉽지는 않다. 다만 한 줄짜리 문장인 극중 대사 한마디에 내 생활을 돌아보고, 관객들 역시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 연극의 정말 큰 매력인 것 같다”라고 했다. 

전국 단위 연극제는 최소 3개월 이상 연습 기간이 필요하다. 3월부터 연극 주제를 정한 뒤 시작하면 말 그대로 ‘정신이 없다’. 이수지 학생은 “평일 야간 자율학습 시간을 빼 강당에서 밤 11∼12시까지 연습하고, 주말에도 아침 8시부터 학교에 나가 반나절 이상을 할애했다”며 “국어, 영어, 수학 등 모두 중요한 과목인 것을 알고 있다. 한데 연극은 교과서 속 이야기가 아닌 ‘내 얘기’를 몸짓과 표정으로 발산해보는 시간이다. 카타르시스라고 하나. 평소 스트레스 받은 부분들을 몸과 마음으로 해소하며 풀 수 있는 게 가장 큰 매력”이라고 했다. 

김지윤 <함께하는 교육> 기자 kimjy13@hanedu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