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권력)


“무섭다. 난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전상국 작가의 <우상의 눈물>(1980) 마지막 문장입 니다. 소설 속 기표가 학교를 떠나면서 여동생에게 남긴 쪽지 내용입니다. 기표는 학교에서 폭력을 휘 두르던 문제아였는데 담임과 반장 형우의 주도면밀 하고 교묘한 술책에 의해 얌전한 아이가 됩니다. 오 히려 기표의 불우한 집안형편이 알려지면서 학생들 사이에서 기표를 돕기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지고, 이 사연이 신문에 미담으로 소개됩니다. 하지만 기 표는 자신의 이야기가 영화로 제작된다는 말을 듣 고 도망을 칩니다. 기표는 왜 도망친 것일까요? 기표 가 무서워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눈치를 챘겠지만, 기표는 자신의 힘을 무력화시킨 더 큰 힘에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폭력으로 남을 괴롭히던 사람이 자신보 다 더 센 폭력을 만나면 기가 죽는 것과 같은 이치입 니다. 기표가 저지른 폭력은 눈에 보이는 폭력이지 만 담임과 형우가 보여준 폭력은 언뜻 봐서는 폭력 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흔히 우리는 물리적으로 가해지는 힘은 폭력으로 인식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적인 폭력은 폭 력으로 인식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요. 선생님은 담 임으로서 학급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정당 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합법적이고, 심지어 담임으 로서 학급 운영을 매우 잘한 것으로 비춰집니다. 하 지만 기표의 힘을 무력화하는 과정에서 담임과 형 우는 계획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하고 미화 합니다.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집단 따돌림이나 폭력은 결국 다른 사람을 힘으로 억누르고 싶은 심리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힘이나 권력은 주로 타 인의 인정에 의해 형성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선망 하고 따르면 그것으로 힘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학 교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 상을 주고 혜택 을 줍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학생들이 공부 잘하는 학생을 부러워하고 선망하지요. 잘생긴 외모나 인 기, 부유함도 힘으로 간주됩니다. 이때 힘을 가진 사 람이 힘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군림하는 것이 폭 력입니다.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집단 따돌림이나 집단폭력도 결국 이런 힘의 서열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합법적인 폭력, 공권력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까?

<우상의 눈물>에서 담임과 형우의 행동은 학급의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합법적인 폭 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국가 체제로 확 장시켜 생각하면 공권력으로 볼 수 있겠지요. 공권 력은 법으로 인정한 사회적 규범이기 때문에 사회 의 질서와 안정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폭 력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필요악이라고 말하는 사 람도 있습니다. 또 공권력을 정의로운 폭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 알다시피 공권력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에 의해 선출된 집단이 행사하는 권력입니다. 물론 법 의 테두리 내에서 행해지지만 공권력의 사용이 어 느 정도까지 허용되는가는 법 해석이 다를 수 있습니다. 즉 사회적 규범에 의한 폭력, 공권력을 어느 정 도 수준까지 인정할 것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는 뜻이지요.

민주주의는 ‘주권재민’을 원칙으로 합니다. 국민에 게 주권이 있고, 국민이 투표에 의해 선출한 사람이 국민을 대신하여 공권력을 행사하도록 국민으로부 터 위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다 보니 투표에 의해 당선된 권력자가 때로는 주권재민을 빌미로 공 권력을 자신에게 이로운 쪽으로 사용하여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민주주의에서는 3권 분립을 통해 권력자가 공권력을 함부로 쓰지 못하 도록 견제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다 해 도 공권력의 사용은 늘 논란이 됩니다. 그렇다면 국 민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소개할 책 <세상을 바꾸는 힘>에서 저자들 이 말하고자 하는 점도 이것입니다. 법을 만드는 것 도 중요하지만 그 법이 원래 취지와 정신을 살리고 있는지 국민들이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잘못된 쪽으로 쓰일 경우 힘을 모아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무리 학 생인권조례가 만들어졌어도 학생들이 조례에 대해 잘 모르고 그 법을 살리려는 의지가 없다면 조례는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책 속에서 저자 중 한 사람인 조영선(고등학교 교사)은 조례가 제정되었어도 조례 에 강제사항이 없어서 교장 선생님에 의해 학교마 다 인권조례 실행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조 례 자체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조례 는 학생들로 하여금 힘을 만들도록 보장해 주는 것 임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세상을 바꾸는 힘은 스스 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른 저자 김두식(교수)은 현재의 국가 폭력은 감 시에 의한 통제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음을 경고합 니다. 어디에나 설치된 카메라를 비롯하여 매일 사 용하는 신용카드를 통해 국민들의 사생활이 감시될 수 있으며, 힘 있는 권력자가 마음만 먹으면 특정인 을 감시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미디어 기 술의 변화가 새로운 시민 사회를 만드는 계기가 되 고 있다고 말하는 저자도 있습니다. 그런 예가 바로 1인 미디어의 힘입니다. 한 명의 기자가 블로그나 트 위터에 수십만의 팔로워를 이끄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이 시민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결코 작지 않습 니다. 연예인이나 시인의 사회 참여가 큰 변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정당이나 전통적인 미디 어나 연구소,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움직였다면 지 금은 개인이나 소셜미디어를 매개로 하는 네트워크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유럽에는 ‘해적당’과 같은 새로운 개념의 정당도 등장했습니다. 지적재산권의 공유나 가족정책, 환 경, 복지 등을 주장하는 정당으로 젊은이들이 중심 이 되어 움직이고 모두 인터넷을 능숙하게 사용합 니다. 독일의 해적당은 자신들을 리퀴드 데모크라시 (liquid democracy)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흐르는 민 주주의라는 뜻으로 특히 의사결정 과정이 다르다 고 합니다. 당내 의사형성과 의사결정 과정에 누구 라도 참여할 수 있도록 온라인 토론 시스템인 리퀴 드 피드백(liquid feedback)을 개발해 사용합니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하승창(시민운동가)는 이런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오 늘날 전 세계적으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선 이유는 현재의 국가 시스템이 개인이 처한 여러 문제를 해 결해 주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합 니다. 국가 운영 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뜻입니 다. 지금의 대의제나 행정시스템만으로는 시민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해결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전에는 집단의 이익에 동참하는 것을 더 중요시 여겼지만 지금은 개인이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집단 ‘전체’ 가 뭔가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고 하는 자 아가 이전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시대가 되 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시민 한 사람의 힘이 중요한 시대라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상상력이 권력을 바꾼다.”라는 저자 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 미국에서 대통령제를 만들 때 많은 상상력이 동원되었듯이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어떤 공동체를 만들 어갈지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관심을 갖고 상상을 해야 잘못된 것을 바꿀 수 있고, 원하는 세상을 만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어 나갈 힘도 결 국 상상력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좋은 세상을 상 상하려면 무엇이 좋은 세상인지를 알아야겠지요. 당연한 말이지만 독서와 토론으로, 철학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상상력의 바탕이 될 것입니다.

독서교육전문가, (주)리딩웰 대표, 가톨릭대 교육대학원 강사